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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5월 18일, 대한민국의 민주화를 위한 역사적인 한 페이지가 열렸습니다. 그날, 광주는 자유와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의 중심지로 떠올랐습니다. 이는 '5·18 광주 민주화 운동'으로 알려진 운동으로, 대한민국 역사상 가장 강력하고 희생적인 민주화 운동 중 하나로 기억됩니다.
이 글에서는 우리가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을 되새기고, 이를 기념하기 위해 마련된 '5·18 민주화 운동 기록관'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함께 그날의 역사를 돌아보며, 광주 시민들이 용감하게 일어선 그 순간을 되새겨 봅시다.
목차
1. 1980년 5·17 비상계엄령 확대: 민주화 운동 탄압의 시작
2. 1980년 5월 계엄군 투입: 민주화 운동 진압의 시작
3. 1980년 5월 전남대 정문 앞 시위: 계엄군의 잔혹한 폭력
4. 1980년 5월 계엄군의 무차별 진압: 광주 지역 대학생들의 저항
5. 1980년 5월 광주 시민들의 분노와 저항: 계엄군과의 격돌
6. 1980년 5월 광주 학살: 계엄군의 잔인한 집단 발포
7. 1980년 5월 광주 항쟁: 시민군과 광주 공동체의 결속
5·18 민주화 운동 기록관 바로가기
1. 1980년 5·17 비상계엄령 확대: 민주화 운동 탄압의 시작
- 신군부는 1980년 5월 17일, 전국 55개 대학의 학생대표 95명을 회의 중에 연행하고, 24시를 기해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 실시했습니다. 이에 따라 국회부터 대학, 언론사, 방송사까지 각종 기관에 계엄군을 주둔시켰습니다. 계엄사령부는 정치활동 중지를 공포하고 대학에 휴교령을 내리며, 옥내외 집회 시위를 금지하고 언론과 방송의 사전 검열을 강화하는 등의 조치를 취했습니다.
- 이러한 계엄령 확대는 민주화에 대한 국민의 기대와 요구를 무시하고, 재야 정치인과 민주화 운동 관련자를 탄압하는 불법 행위로 여겨졌습니다.
2. 1980년 5월 계엄군 투입: 민주화 운동 진압의 시작
- 1980년 5월 17일 21시 40분, 임시국무회의가 비상계엄 확대 선포안을 의결하자 신군부는 서울, 부산, 대구, 광주 등 대도시에 군대를 투입했습니다. 서울에는 1, 3, 5, 9, 11, 13 공수여단이, 광주에는 7공수여단 33대대와 35대대가 전남대와 조선대에 투입되어 민주화운동 세력을 제압했습니다.
- 이러한 계엄군의 투입은 민주화 운동 진압의 시작을 의미합니다. 군사적인 힘을 동원하여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시민들을 탄압하고 집권 정권을 유지하기 위한 조치였습니다. 이로 인해 많은 희생이 발생하며, 대한민국의 정치 상황에 큰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3. 1980년 5월 전남대 정문 앞 시위: 계엄군의 잔혹한 폭력
- 1980년 5월 18일 10시 무렵, 전남대학교 정문 앞에서 등교하려는 학생들을 막아 세운 계엄군이 있었습니다. 이에 학생들은 이를 거부하고 항의했으나, 계엄군은 잔혹한 폭력을 행사했습니다.
- 학생들뿐만 아니라 시민들도 계엄군의 폭력에 맞서려 했지만, 그들 또한 폭언과 구타를 당했습니다.
4. 1980년 5월 계엄군의 무차별 진압: 광주 지역 대학생들의 저항
- 1980년 5월, 광주 지역 대학생들은 비상계엄 해제와 전두환 정권의 퇴진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습니다. "비상계엄 해제하라", "전두환 물러가라" 등의 구호를 외치며 민주화 시위를 벌이던 이들에 대해 계엄군은 무차별적인 폭력을 행사했습니다.
- 시위하는 학생과 청년들을 도주하는 동안 쫓아가 시내 곳곳을 누비며 무자비한 진압을 시행했습니다. 젊은 남자들을 끌어내어 폭력을 행사하고, 옷을 벗기고 구타하여 연행했습니다. 이러한 무차별 진압은 시민들의 인권을 엄청나게 침해하였으며, 광주 지역의 민중들은 이에 저항하고 항쟁을 이어갔습니다.
5. 1980년 5월 광주 시민들의 분노와 저항: 계엄군과의 격돌
- 1980년 5월, 광주 지역의 시민들은 계엄군의 폭력에 저항하고 분노를 표출했습니다. 계엄군은 사람들이 모이는 것만으로도 해산을 위협하고 폭력을 가하며, 많은 시민들이 구타를 당하며 심각한 부상을 입었습니다. 이에 시민들은 계엄군의 잔인한 행위에 분노를 느끼며 적극적으로 저항하기 시작했습니다.
- 5월 19일 새벽, 광주 도심에서는 시민과 계엄군 사이에 격렬한 대치와 충돌이 벌어졌습니다. 계엄군은 장갑차와 헬기를 동원하여 광주역 앞에서 발포하기도 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고등학생인 김영찬 군과 청각장애인인 김경철씨 등이 피해를 입었습니다.
- 저녁이 되자 도심으로 다시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금남로에는 200여 대의 차량 시위대가 출현했습니다. 이에 계엄군과 경찰은 최루탄과 가스로 이를 저지하려 했지만, 시민들의 저항은 강력했습니다. 시민들은 정부의 진압을 규탄하며 노동청과 세무서로 모여가고, 방송국에도 항의를 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광주 MBC 방송국 건물에 화재가 발생하기도 했습니다.
6. 1980년 5월 광주 학살: 계엄군의 잔인한 집단 발포
- 1980년 5월 20일, 계엄군은 광주와 외부를 연결하는 전화를 차단하고 광주시민을 완전히 고립시켰습니다. 도심 곳곳에서는 화재로 인한 불꽃과 연기가 피어올랐고, 광주역에서 발견된 시체 2구가 리어카에 실려 금남로에 나타났습니다. 이로써 광주시민들의 분노는 극에 달했습니다.
- 시민들은 계엄군이 주둔한 전남도청을 찾아 거세게 항의했지만, 정부 당국은 묵묵부답이었습니다. 결국 시민들은 군의 저지선을 넘어서며 계엄군은 이들을 향해 발포했습니다. 저격수들은 시민들을 향해 조준 사격을 하였고, 총탄에 맞은 시민들은 차례로 금남로에 쓰러졌습니다.
- 계엄군의 잔인한 사격은 시신을 대열에서 끌어내는 것뿐만 아니라 부상자를 병원으로 이송하려는 시민들에게도 향했습니다. 광주 시내의 병원은 이송된 환자와 시신으로 넘쳤으며, 부상자가 늘어나자 병원 앞에는 주부, 아주머니, 젊은 여성들이 헌혈을 위해 몰려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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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1980년 5월 광주 항쟁: 시민군과 광주 공동체의 결속
- 1980년 5월, 계엄군의 잔인한 진압에 분노한 광주 시민들은 자위를 위해 스스로 무장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를 위해 일부 시민들은 광주 근교로 흩어져 화순, 나주, 영산포, 장성, 영광, 담양 등으로 달려가 총을 확보했고, 심지어 아시아자동차 공장에서는 장갑차 등의 차량을 확보하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무장한 시민들은 자연스럽게 '시민군'이라고 불릴 정도로 결속력을 보였습니다.
- 시민군과 계엄군의 공방 속에서 계엄군은 전략적으로 퇴각하면서 시민들은 도청을 장악하며 승리감을 느꼈습니다. 시민들은 길거리에 흩어져 있던 잔해들을 치워내고 시내를 청소하며 통일된 광주 공동체를 형성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이후에는 흩어져 있던 시민군을 모아 재편성하여 치안을 유지하고 도청을 중심으로 광주를 방어하기 시작했습니다.
- 그러나 계엄군은 광주를 봉쇄하고 진입로 7개 지점을 차단하여 시민들을 격리했습니다. 시 외각에서는 매복하여 시민들에게 사격을 가하며 많은 희생자를 발생시켰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시민들은 단합하여 광주의 자유를 지키기 위한 투쟁을 이어나갔습니다.
8. 1980년 5월 광주 시민 공동체의 결성과 투쟁
- 1980년 5월 21일부터 26일까지의 7일 동안, 광주에서는 계엄군을 몰아내고 시민군이 전남도청을 사수하며 시민 공동체가 형성되었습니다. 이 기간 동안 광주는 사회적인 연대와 공동의 목표를 향한 힘찬 결속력을 보여주었습니다.
- 「5·18수습대책위원회」와 「학생수습대책위원회」를 비롯한 다양한 시민 단체들이 결성되어 계엄사 측과의 협상활동과 시내의 자치활동을 이끌어나갔습니다. 이 과정에서는 시민들의 자발적인 노력으로 길거리가 청소되었고, 시장 상인들은 주변 길가에서 밥을 지어 시민군들에게 식사를 제공하는 등 공동체의 연대 정신이 발현되었습니다.
- 전남도청 분수대에서는 매일 '시민궐기대회'가 열렸으며, 이를 통해 사건의 진실과 정황을 알리는 성명서와 투사회보 등이 배포되었습니다. 또한 시민들은 함께 희생자를 추모하기 위해 도청 앞에 향을 피우고, 분향대에는 희생자의 시신을 담은 관들이 놓여져 있었습니다.
- 그러나 신군부는 광주의 상황을 왜곡하여 '치안 부재 상태'라고 조작 보도하고, 계엄군의 살인적 진압을 은폐하려 했습니다. 또한 수습대책위원회는 계엄군과의 협상 과정에서 내부 의견에 혼선을 겪었으며, 계엄사 정보요원의 교란작전으로 협의에 긍정적인 결과를 이끌어내지 못했습니다.
9. 1980년 5월 광주 최후의 항쟁: 시민의 피로 쓴 용기
- 5월 26일, 광주는 결국 최후의 항쟁을 맞이했습니다. 계엄군의 탱크가 시내로 진입하고 있다는 소식에도 불구하고, 김성용 신부를 비롯한 시민 대표들은 맨몸으로 탱크의 진입을 막으려고 나섰습니다. 도로 위에 드러누운 시민들은 자신들의 땀과 피로 시민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 투쟁하는 결연한 의지를 보여주었습니다.
- 그러나 5월 27일 새벽, 계엄군의 특공대가 투입되었습니다. 광주 도심 곳곳에서는 "계엄군이 쳐들어오고 있습니다. 시민 여러분! 우리를 잊지 말아 주십시오"라는 목소리가 울려 퍼졌습니다. 이제 사람들은 죽음의 그늘 아래에서 도청을 떠나려 했지만, 많은 시민들은 자리를 지켰습니다.
- 새벽 4시경, 계엄군은 다시 도청을 향해 진군했습니다. 교전은 단 한 시간 남짓이었지만, 윤상원을 비롯한 많은 시민들이 싸늘한 시신이 되었습니다. 이날 전남도청에서 몇 명이 머물렀고, 몇 명이 목숨을 잃었는지는 아직도 명확히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10일간의 항쟁 동안 희생된 많은 이들은 망월동 국립 5·18묘지에 안장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용기와 희생으로 말미암아 역사에 기록될 것입니다.
10. 5·18 민주화운동 기록관: 대한민국 역사의 보고서
- 1980년 5월 18일부터 27일까지 10일 동안 광주에서 일어난 5·18 민주화운동은 대한민국 역사상 가장 의로운 항쟁 중 하나입니다. 이러한 역사적 사건을 기념하고자, 2015년에 설립된 5·18 민주화운동 기록관은 대한민국을 지금의 민주주의 국가로 만든 이 사건의 기록유산을 체계적으로 수집하여 영구 보존하고 있습니다.
- 이 기록관은 옛 광주가톨릭센터에 자리하고 있으며, 광주 시민들의 노력으로 2011년 유네스코 세계기록 유산에 등재되었습니다. 여기에서는 '5·18 민주화운동'의 역사적 의미를 세계인들과 함께 공유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합니다. 이 기록관을 방문하면 직접 관람을 통해 이 사건의 역사적인 순간을 체험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정기해설과 온라인 전시관을 통해 관람할 수도 있습니다.
5·18 민주화운동 기록관은 대한민국 국민 모두에게 역사를 간직하고 공유하는 소중한 장소입니다. 이곳을 방문하여 우리 역사의 흐름과 시민들의 투쟁 정신을 되새겨 보는 것은 우리의 민주주의 발전에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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